2024-04-26 17:51 (금)
일으키는 자와 밟는 자
일으키는 자와 밟는 자
  • 감충효
  • 승인 2019.02.16 12: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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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어느 바위로 된 산길을 오르다가 그냥 지나가기에 민망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소나무가 바위위에 드러누워 등산객에게 밟히거나 꺾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큰 바위의 가느다란 균열에 솔 씨가 떨어져 천신만고 끝에 뿌리를 내렸지만 바위를 따라 옆으로 누워 클 수밖에 없었던 운명의 소나무였습니다.

옆으로 누워서 커가다 보니 그 무게를 못 이겨 밑 둥이 더 버티지 못하여 뿌리가 뽑혀져 올라오고 있었고 얼마 못가 부러지거나 완전히 뽑혀질 운명을 타고난 이 소나무는 수령이 50년 정도 되어 보이는 참솔이었습니다. 바위틈의 좋지 않은 환경에서는 더디게 자라기 때문에 50년이나 100년 정도 자라봐야 밑동의 굵기가 사람 허벅지 보다 작습니다.

필자는 누군가 밟거나 철없는 아이들이 올라가거나 올 겨울 눈이라도 많이 온다면 뽑혀지거나 부러질 운명에 처해질 소나무를 살려보기로 했습니다. 주변 계곡을 뒤져 지주로 쓸 고사목을 찾아냈습니다. 참나무였습니다. 참나무 종류는 잘 썩지 않아 꽤 오래 단단함을 유지하기에 받침목으로는 좋은 재목입니다. 더구나 끝부분이  Y자모양으로 생겨서 안성맞춤이었습니다. 드러누운 나무를 지주로 받쳐 어깨로 힘껏 들어 올려 받침대를 세우니 당장 반만치 뽑혔던 뿌리가 흙속으로 들어가 묻히게 되었고 바위에 옆으로 드러누웠던 소나무는 사람 키보다 높이 솟아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변의 흙을 떠다 뿌리부분의 사이사이에 보토를 해주었습니다.

 

후로 부러졌던 가지에는 다시 순이 오르고 잘 크면서 수형도 잡혀가기에 가끔씩 이 등산로를 타고 오르면서 인연을 맺은 이 소나무 밑을 지나면서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뿌리만 튼실하게 내려 옆으로 잘 자라기만 하면 수직으로 자란 소나무 보다 관상가치가 훨씬 있어 보이기도 했습니다. 불안한 뿌리 상태를 지주가 받쳐주는 덕택에 수분과 영양공급이 개선됨에 따라 성장속도가 아주 빨라지게 되었고 사람들로부터 해꼬지를 당하지 않아서 옆으로 비스듬히 누운 상태의 멋있는 조선솔의 진면목을 갖춰가는 것이 참으로 고맙기도 했습니다.

그 후 아내와 모처럼 같이 등산을 가게 되었습니다. 허구 헌 날 산길 달리기 준비한다면서 혼자서 뛰어다니는 필자의 모습을 아내는 별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멀리 팔도 산을 돌아다닐 때도 많이 동행하지 못한 것에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동행하려고 애를 쓰지만 가정일이나 여인네들끼리의 모임이나 할머니 할아버지를 너무나 좋아하는 손자 손녀를 유치원과 초등학교 교육이 없는 금요일 오후에 데려와서 놀이공원과 공설운동장, 뒷산으로 데리고 다니며 친환경 교육을 시켜주고 서울 사람들이 즐겨찾는 음식점에 데려가 영양보충도 시켜주는 사랑을 흠뻑 쏟아주다가 일요일 저녁이나 월요일 아침에 데려다주는일을 즐겨하기에 동행해서 산에가는 기회를 자주 만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모처럼 부부가 산행코스를 옆으로 누운 소나무가 있는 곳으로 잡았습니다. 멀리서 보면 보여야 할 소나무가 안보여 의아했는데 현장에 도달해보니 지난 번 받쳐놓은 받침대가 없어지고 말았고 소나무는 사람 키보다 낮게 쳐져 있었습니다. 누군가 산길을 가다가 부딪칠 수 있는 높이이고 장난 끼 있는 사람이 매달리거나 밟기라도 한다면 부러지거나 당장 뿌리가 뽑혀 넘어질 수 도 있는 상황이어서 부랴부랴 또 받침목이 될 수 있는 나무를 구해다가 필자는 나무를 어깨로 받쳐 올리고 아내는 받침대를 괴이면서 일단 나무가 쓰러지지 않게 대충 받쳐 놓고 왔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그 곳으로 필자의 부부는 산행을 또 갔는데 그 때는 톱을 가져갔습니다. 대충 받쳐놓은 받침대를 확실히 자리매김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선 받침대의 길이가 너무 짧아 더 긴 것을 구해 더 치켜 올려 드러누운 소나무를 더욱 높이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산행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또 누군가 받쳐 놓은 받침대를 없애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쯤에서 필자의 머리에 전기 스파크 같은 것이 푸른 불빛을 일으키며 지나갑니다. 받침대를 없애버린 사람은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소나무가 넘어지거나 부러지거나 뿌리가 뽑힐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받침대를 해 놓은 것을 알만도 할 텐데 그걸 치워버린 걸 보면 분명 마음 씀씀이가 빈약하거나 비비꼬인 사람의 짓이란 걸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거기다가 나무를 밟고 지나갔는지 가지도 많이 부러져 있었습니다.

옛날부터 가꾼 사람 따로 있고 그 과일 따 먹는 사람 따로 있다는 말이 있어왔습니다. 드러누워 위기에 처한 소나무에 받침대 세운 것이 뭐 대단한 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 걸 밟고 지나가는 것보다야 훨씬 건설적이고 생산적이고 인성적으로도 양질의 것이 분명합니다.

허구 헌 날 자기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을 갉아먹고 뒤엎고 뿌리 까지 파먹어 파괴하고 없애기에 혈안이 된 꽈배기 무리들이 있는가 하면 피땀 흘려 보충하고 지키기에 평생을 바치면서 후손들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나 나라나 국제사회에서나 공통적인 선과 악의 패턴입니다. 자기가 서있는 땅을 무너뜨리면서 나중에 자기가 설 땅도 없을 때 날개라도 있어 날아가기라도 할 요량인지 참 아둔하고 위험하고 걱정스럽기만 합니다.

더 이상 선량한 사람들이 선량하지 못한 사람들의 희생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더 이상 활개 치는 악의 기운을 몰아내야 합니다. 세상은 때로는 악이 창궐하여 선을 구축하는 경우가 역사적으로 많이 있어 왔습니다. 그 음흉스러움의 창궐은 얼마 못가 들통이 나고 정의는 항상 이겨왔고 악은 망했습니다. 이는 세계 역사가 그렇고 국가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악으로 한 번 망했다가 조금 살만하니 또 구악을 일삼는 무리들은 대내외를 막론하고 있어온 일입니다. 그것을 인식 못하고 부화뇌동하는 무리들은 참으로 불쌍하기 짝이 없고 뒷날 모든 것이 물거품 되었을 때 천만 번 후회해도 이미 때늦은 일입니다.

필자의 부부가 살리려고 힘을 쏟고 있는 소나무의 사연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다시는 받침대를 없애버리는 사람이 없기를 바랄뿐입니다.

일으키는 자와 밟는 자의 소나무 이야기가 한낱 소나무 한 그루를 살리자는 것보다 더 큰 의미로 뇌리를 스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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