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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어탕 한 그릇을 위한 산길 20여리의 사연
추어탕 한 그릇을 위한 산길 20여리의 사연
  • 감충효
  • 승인 2019.02.16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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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어탕 한 그릇을 위한 산길 20여리의 사연

 

필자는 천보산맥을 자주 오릅니다. 오늘은 몇 고개를 넘어 이곳에서 말하는 투바위 고개까지 가기로 했습니다. 양주에서 포천 넘어가는 이 고개는 옛날 군사도로였는데 그 고갯마루에 추어탕 하는 집이 있어 도시락을 안 가져가도 여기서 점심을 해결하면 안성맞춤입니다. 기왕에 이 산맥은 호국보훈의 달 6월 한 달 동안 거의 매일 맨발산행을 했기에 오늘도 그 곳까지 맨발산행을 이어가기로 했습니다. 추어탕 한 그릇 때문에 그 곳을 가는 것은 아니지만 산을 넘으면서 한 번씩 들렸던 그 추어탕집의 추어탕 맛을 이어가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거리는 약 20여리 산길이지만 부지런히 가면 오후 2시경에는 그곳에 도착할 것입니다.

필자가 그 날 탄 천보산맥은 서울의 도봉산 우측의 의정부를 기점으로 오른 쪽은 포천시, 왼쪽은 양주시를 양 날개 하여 동두천까지 24km의 길이로 야트막하게 이어진 산맥입니다. 25 여개 산을 품은 이 산맥은 해발고도 200m급 1개, 300m급 20개, 400m급 2개, 600m급 2개로 그 오르내림이 과히 급하지 않고 아기자기한 솔밭 길에다가 바위 길도 간간이 있어 큰 부담 없고 지루하지도 않게 편안한 마음으로 오를 수 있는 산입니다.

 

이 산맥을 타고 가다보면 6개의 보루를 지나게 되는데 옛날부터 천보산의 주요 고개들과 길목을 통제하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축조 당시의 석재와 고구려 시대의 도기편과 여러 문양의 기와편도 출토되었다고 안내판에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이 산맥의 산자락에 딸려있는 회암사지(檜巖寺址)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소중한 문화재입니다. 사적 제128호. 창건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보우선사의 원증국사탑비(圓證國師塔碑)에 의해 1313년(충숙왕 즉위) 이전에 이미 절이 창건되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1326년 고려에 온 인도 승려 지공(指空)이 천력연간(1328~29)에 회암사의 절터를 측량했다는 기록으로 인해 지공이 창건했다고도 합니다. 지공, 나옹, 무학으로 이어지는 이곳을 둘러보는 의미도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1376년(우왕 2) 지공의 제자인 나옹(懶翁)이 삼산양수지기(三山兩水之記)의 비기(秘記)에서 이곳은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와 지형이 같으므로 가람을 지으면 불법이 크게 흥한다고 하여 이 절을 중창했습니다. 한편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를 이곳에 머물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퇴위 후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했습니다.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던 이 절은 대가람이었으며, 1424년(세종 6)에 행해진 선교양종(禪敎兩宗) 폐합 때의 기록으로도 그 규모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1472년(성종 3) 세조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명으로 정현조(鄭顯祖)가 중창했고, 명종 때에는 보우를 신임한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비호로 다시 전국제일의 수선도량이 되었습니다. 왕후가 죽은 뒤 유생들의 탄핵으로 보우가 처형되고 절도 황폐해졌다고 합니다. 선조 때까지는 기록에 간간이 절의 이름이 보이지만 1818년 재건한 무학대사비에는 폐사되었다고 하므로 선조 이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재 옛 절터 부근에는 1977년 중건한 대웅전,삼성각,영성각(影聖閣) 등이 있습니다.

 

절터에는 중요문화재로 회암사지선각왕사비(檜巖寺址禪覺王師碑:보물 제387호)·회암사지부도(보물 제388호), 회암사지쌍사자석등(보물 제389호), 지공선사부도 및 석등(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9호),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호), 무학대사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호), 회암사지부도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2호) 등이 남아 있습니다.

 

이쯤해서 무학대사의 스승이며 이 절을 중창한 나옹선사의 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그리고 이 산맥의 양주시 쪽으로 회암동이 있는데 풍류 방랑시인 김삿갓[金笠, 金炳淵]이 태어난 곳입니다. 그의 무덤은 영월에 있지만 태어나 자란 곳은 이곳이어서 해마다 김삿갓 관련 문화행사가 열리고 있습니다.

 

이 산맥의 종주는 빠른 걸음으로 10시간 정도, 좀 주위경관을 보며 오르려면 11시간 정도가 소요됩니다. 하루 10시간 이상 산을 탄다는 것은 상당한 체력의 소유자라야 가능합니다. 필자가 삼년 전 겨울에 이 산맥을 타다가 칠봉산 오르막에서 날이 완전 어두워졌는데 눈까지 뿌리는 바람에 하산길이 참 험난했습니다. 그래도 가지고 간 하모니카를 놀릴 수는 없어 정상에서 몇 곡을 날리던 일도 생각납니다. 눈발이 뿌려지니 그날따라 하모니카에서 울려나오는 곡이 정말 애처롭기 짝이 없었습니다. 좀 경쾌한 곡을 날려도 돌아오는 여운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날 천보산맥을 첫 등정한 후 남긴 시가 있어 떠 올려봅니다.

 

보루마다 부릅뜬 눈 내 민족을 지켰느니

나옹 선사 바람같이 물같이 살라 하던

회암사 그 터를 지나 육 보루를 건넌다.

 

사백 미터 탑 고개며 한북정맥 갈림길도

어하고개 넘을 쯤엔 아득히 멀어지고

회암 고개 숨고를 쯤엔 하루해가 저문다.

 

양주 포천 좌우 날개 동두천에 접을 쯤엔

칠봉산 오백 고지 투구 석봉 독수리봉

소요산 감악산 건너 북녘 하늘 비친다.

 

필자의 제2시집 <남녘 바람 불거든> 게재 시 ‘천보산맥’ 전문

 

천보산맥에 관심 가진 것은 몇 년 전 도봉산 최고봉 자운봉에서 바라본 이곳의 유려한 초승달 모양의 긴 흐름과 중간에 눈부시게 빛나는 하얀색 거대 암반이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도봉산 정상에서는 그렇게 하얗게 뚜렷이 보이던 이 거대 암반이 이 산을 오르면 보이지 않아 일곱번을 올라서야 겨우 찾아냈다는 것입니다. 주변 상태로 보아 전인미답의 암반지대로 남아있는 곳이었고 가끔 솔개나 매가 사냥해온 것을 처리한 흔적만 남아있는 곳이었습니다. 암반에 얹혀 있는 작거나 큰 바위들은 태고의 원형 그대로 인데 그 암반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한 아름 크기의 참나무 그루터기에 솟아난 영지(靈芝)군락을 만난 인연이 있습니다.

오늘도 지나가다가 들려봅니다. 생긴 모습이나 품어져 나오는 서기는 범상을 뛰어 넘어 오래된 대물 영물인 듯 했습니다. 진시황제가 동남동녀 오백 명을 선발해 서불로 하여금 동쪽으로 보내면서 영약을 따오라고 했는데 그 불로초가 영지(靈芝)였다니 필자로서도 이 전설적인 버섯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고 십장생도에도 나오는 것을 보면 좋은 약이긴 한 모양입니다. 고동색 삿갓 주변에 휘두른 찬란한 황금빛 테는 눈이 부실 정도였습니다. 참나무를 빙 둘러가며 생겨난 영지는 대충 20포기가 넘을듯한데 작년에 봤을 때도 다 자란 것이 손바닥 보다 넓은 대형이었습니다. 대개 큰 나무 그루터기의 영지는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기 때문에 손바닥 크기의 대물로 자라납니다. 작년에 몇 그루 남겨두었는데 그 종균이 퍼져 참나무 뿌리가 뻗어간 곳까지 올망졸망 갓머리를 올리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장마기가 지나고 8월 말쯤에 최대 크기가 될 것 같아 그 때 다시 찾아오기로 했습니다.

얼마 전 바위에 누워서 예쁘게 자란 참솔이 등산객에게 밟히고 있어 받침대를 세워 일으켜 주었는데 무슨 변화가 있나하고 가 봤더니 받침대도 잘 있고 소나무도 독야청청 푸를대로 푸러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오늘 산길 20여리 맨발산행은 고갯길 추어탕 주막에서 끝입니다. 시간은 더 있지만 더 갈려면 발바닥이 견디는 한계점도 생각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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