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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명(陶淵明)의 귀원전거(歸園田居)와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찬찬히 생각해 보니...(2)
2019. 05. 05 by 감충효

그 농토를 안고 도는 봉천이라는 큰 하천에는 여름 날 멱 감으며 고태기와 송사리와 가재를 잡던 추억,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이면 아버님을 따라 봉천 지류에 대발을 치고 참게와 뱀장어를 한 바구니씩 잡던 추억, 그 봉천이 끝나는 곳에 강진바다가 펼쳐져 온갖 해산물이 넘쳐나 자맥질로 소라와 피조개 새조개를 건져 올리던 추억이 새롭습니다. 밀물이 봉천까지 밀고 오면 당숙께서는 삼망거물을 치는데 숭어가 동네 사람들이 다 나누어 먹을 정도로 걸렸습니다. 썰물로 엄청난 개펄이 드러나면 지천에 굴과 낙지와 바지락이었고 지금 비싼 값에 거래되는 웰빙 해초가 널부러져 있었으며 미쳐 썰물에 못 따라간 해초덤불 속의 웅덩이의 물고기들은 소쿠리나 반두로 많이 떴었지요.

 

그 뿐만 아니라 조선 숙종 조 국문학사에 금자탑으로 빛나는 구운몽의 저자 서포 김만중 선생이 유배를 온 남해 노도 적소에 선비들과 교유한 한양의 옛집 서재를 마음에 두고 매화나무 두 그루를 심어 가꾸며 적적하고 황망한 마음을 달랬습니다. 그 뒤 사사로이는 그의 사위가 되는 소재 이이명 선생도 몇 년 뒤 사화에 연루되어 남해로 유배를 와 이곳 읍성의 죽산리 부근에 적소를 정하고 장인의 적소인 노도로 가보니 장인인 서포 김만중 선생은 이미 이 곳 적소에서 유명을 달리하고 널이 선산으로 옮겨 간 뒤였으니 망연자실 큰 슬픔을 가눌 수 없었습니다. 슬픈 마음으로 장인의 적소를 돌아보던 중 장인이 키우던 매화 두 그루가 주인을 잃고 시들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장인이 키우던 매화나무 두 그루를 소재 선생은 자기의 적소로 옮겨와 키우니 마치 옛 주인을 만난 듯 힘을 얻고 꽃을 피워 튼실한 매실을 달았다는 내용의 글을 지었으니 이것이 바로 현존하는 매부(梅賦)의 시입니다. 기회 있을 때 이 시를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정치적으로 불의에 항거하며 임금 앞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오로지 곧은 선비정신으로 조정을 바로잡고자 했던 두 분의 정신이 서로 감응하여 지어진 매부(梅賦)는 그 가치가 어느 문학작품보다도 고도의 정신세계를 표현한 글이라서 후세들에게 크나큰 감동을 주는 시입니다.

 

소재 선생은 적소에 습감재(習坎齋)라는 현판을 걸자 남해 유생들은 물론 인근 사천 하동의 유생들도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자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세종대왕의 7대 손으로 조정의 좌의정 벼슬까지 올랐으니 그 명성이 자자했음은 물론이고 선비라면 이 명문대가의 정승에게 사사 받음을 큰 영광으로 삼았을 듯합니다. 산청의 지방 토호 선비로 특히 사천과 하동에 걸쳐 문하생을 배출하였던 직하재(稷下齋) 문헌상(文憲尙:1652~1722) 선생은 자주 습감재를 찾아 왔던 선비로 후에 이이명 선생이 돌아가실 때 운명을 같이 한 인물입니다. 소제 선생이 남해로 유배 올 때도 같이 와 있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절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그 시대의 당쟁은 피도 눈물도 없었고 체면도 도덕성도 없는 잔인 무도하고 악랄한 이전투구의 양상이어서 그 회오리 속에서 참으로 아까운 인물들이 목숨을 잃거나 고초를 당하였는데 소제 이이명 역시 그러한 인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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