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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의 역사(6)
2019. 04. 21 by 감충효

우리 고향의 발전을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은 민초들의 활동은 국책사업이거나 민간주도 사업이건 간에 정말 눈부셨다. 그 때의 민초들이 어떤 정신으로 고향을 지켜왔고 발전시켜 왔는지 대충 60년대부터 70년대까지의 밑바닥 인심을 훑어보면서 시류에 편승하지 않은 참으로 도타운 정신적 소산이었던 일들을 소개하려 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기록으로 남겨놓지 않으면 후대에 멸실될 우려가 있고 그렇게 멸실되게 두기에는 너무나 소중한 우리 고장의 정신적 자산이며 후대의 귀감으로 삼아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크게 이름을 날렸다거나 사업적으로 크게 되었다거나 머리가 명석하여 무슨 공부를 잘해서 고급관리채용시험에 합격하여 입신양명했다거나 예술 감각이 뛰어나 그 방면으로 유명세를 탔다거나 국회의원이나 도지사, 시장, 군수, 지방의회 의원으로 뽑혔다거나 하는 사람들은 자의든 타의든 너무나 많이 알려졌으니 필자가 이런 데서 언급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개인적인 일이기 때문에 공이야 있던 없던 간에 그리고 오물을 뒤집어 쓴 이름이라도 그 흔적은 국비를 들여 기록 보관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한 학급이 65명이나 되어 마치 콩나물시루 같다는 표현을 쓰기도 하였는데 그 후 점점 불어난 학생을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을 때가 되어 학교를 새로 지어야 하는데 나라의 예산이 부족하여 쩔쩔 맬 때 평소 후진 양성의 교육에 관심이 많은 독지가가 사재를 털어 학교부지나 교실 몇 칸 지을 돈을 쾌척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 때 필자는 이 분들은 정말 천사와 같은 분들이라 생각되었다.

그 무렵 고향에는 새로 생기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이러한 독지가들 분들의 쾌척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있었고 또한 장학회까지 만들어 고향 후진 양성에 진력하는 것을 보았었는데 지금 그 분들의 2세들이 또한 선친의 뜻을 이어 받아 장학회를 만들고 기금을 쾌척하는 것을 보며 그 도타운 행적이 잠깐 일회로 끝나고 사라지는 현실이 안타까웠었다. 그리고 그 분들의 공적이 당대에 끝나지 않고 후대에 귀감이 되는 기록으로 남기를 바란다.

선친들의 장학사업을 찾아보고 그 후세들이 지금 어떻게 선친들의 뜻을 이어가고 있는지 정리하여 현세와 후세의 귀감으로 삼고 싶은 생각이 뻗혀 일어난다.

필자가 고향의 자료들을 모아 본 결과 선대로서 이런 반열에 오르는 분이 6분 정도는 되고 그 자제들이 6분이 되니 한 분 한 분 연재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워보지만 많이 늦어지거나 혹은 여러 사정으로 대상이 줄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본인이나 후손들이 원하지 않을 경우도 있으니 가능한 선에서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

단, 지금 농어촌의 인구 감소와 저출산 현상으로 그 때와는 다른 일이 일어나서 학교를 오히려 통폐합하는 곳이 속출하고 우리 고향도 그 것을 피해갈 수는 없다. 전국적인 현상이기에 그 때 콩나물시루 같았던 과밀 학급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개념의 일이다. 인구가 기아급수로 불어나서 그것을 국가가 다 수용할 수 없을 때 그 어려움은 정말 컷다. 한 교실에 60명에서 70명이 와글거리는 그 어려운 환경을 보다 못해 사재를 쾌척하는 일은 아무나 못하는 일이다. 애민, 애향, 애국심과 후학 양성의 선각자적인  숭고한 뜻이 없이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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