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로가기
여명의 역사(5)
2019. 04. 21 by 감충효

미국은 자국의 잉여농산물을 저개발국의 식량부족 완화를 위하여 농산물을 원조할 수 있는 법을 만들었는데 이 법이 미공법 480호였으며 줄여서 PL 480이라 하였다. 한국은 1955년 이 법의 제1조에 따라 협정을 체결하여 1956년부터 잉여농산물 원조를 받기 시작하였으며, 국토건설사업을 위하여 제2조에 의한 잉여농산물을 받은 일도 있으나, 이 법에 의한 원조는 1981년으로 일단 종료되었다. (두산백과)

 

미국의 원조가 없었다면 한국은 보릿고개를 넘지 못하고 누렇게 부황이 떠서 아사 하는 사람이 훨씬 많았을 것이다. 이때만 해도 북한이 남한보다 더 잘살았다고 하는데 아마 인구는 우리보다 적은데다가 지하자원이 남한보다 풍부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수풍댐에서의 발전량이 풍부하여 큰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우리 남한의 경제가 여러 평균지표로 북한의 20배 쯤 되는 걸로 알고 있다. 같은 반도에 있으면서 왜 이런 차이가 났는지는 미루어 짐작해 봐도 그 답을 찾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이렇게 한국경제가 세계 10위권을 구가하였다. 하지만 지지리도 못살았던 그 어려웠던 시절을 잘 모르거나 알았더라도 이제 거의 망각해 가는 실정인 것 같다. 하지만 필자의 세대는 아시아 최빈국의 엄청난 가난과 시련을 겪으면서 잘살아 보자는 지도자의 국책을 믿고 따라 하나 된 마음으로 새마을 운동에 직접 참여하였다. 그리고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경제개발 도상국으로 진입하여 오늘의 경제 대국을 이룩하기까지 같이 동고동락을 같이 해온 세대다.

 

우리의 경제를 이룩하기에는 필자가 연재하고 있는 내용과 같이 눈물겨운 수십년의 피땀 어리 과정이 있었다. 그러나 수백년이 가도 그 가난을 못 벗어나는 나라도 이 지구상에는 얼마든지 있고 한 때 번영을 구가하던 나라도 포플리즘의 망상에 눈먼 지도자를 잘 못 뽑아 하루 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져 먹을 것을 찾아 쓰레기 통을 뒤지는 비참한 지경에 봉착한 나라가 생겨나기도 했다. 경제를 일으키기는 어려우나 무너뜨리는 것은 순식간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