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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 충렬사
노량 충렬사
  • 조세윤
  • 승인 2018.08.09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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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욕일

남해충렬사는 이순신의 신위를 모신 不遷位(불천위)의 사우이다. 불천위는 덕망이 높고 국가에 큰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영원히 사당에 모시도록 국가에서 허가한 신위(神位)를 말한다. 1973년 6월11일 사적 제 233호로 지정되었다. 이순신 장군께서 노량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장렬히 전사하자 그가 자란 고향인 아산으로 운구하기 전에 남해로 도주한 왜놈들의 잔적을 소탕하기 위해 장군의 유해를 잠시 이곳 노량바다가의 언덕배기에 초빈을 설치하고 안치 하였다고 한다.

이 자리에 장군이 순국하신지 30년 후에 이 지방 선비인 김여빈과 고승휴 두 어른이 장군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지방인들에게 여론을 일으켜 재물을 모으고 집안의 자제들과 노비를 동원하여 터를 닦고 돌과 나무를 운반하여 초옥사당 1칸을 건립하였다. 여기에 장군의 위패를 모신 것이 남해충렬사의 시초였다. 이후 장군의 순국 60주년이 되는 해인 1658년에 나라에서 초당을 철거하고 사우를 중건하였다. 1660년에는 비와 비각을 건립하였다. 1663년에 조선조 18대 임금인 현종이 ‘충렬사’라는 어필 현액을 하사하였다.

이때에 비로소 충렬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현재 현액은 이순신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사우)의 당호로 현판되어 있다. 남해충렬사에는 ‘충렬사’라는 현판이 세 개가 있는데, 장군의 사당 이외에 박정희대통령 친필 현판이 내삼문에, 그리고 서예가인 추당 박호병씨가 쓴 현판이 외삼문에 걸려있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어필 현판은 부석사의 무량수전(無量壽殿)과 경북 안동군 청사에 걸려 있는 안동웅부(安東雄府)의 현판인데, 모두 고려말 공민왕의 글씨라고 전한다. 1721년에는 부속시설로 서원을 건립하여 1722년 개원하였는데, ‘노량서원’이라 이름하고 150년간 사림을 대상으로 한 유생교육과 사우관리를 위해 존속하다 1871년 철폐되었다.

이 곳 충렬사는 중건이후 1925년까지 약 200여 년간 장군의 후손들인 5세손부터 11세손까지 7대가 참여하여 사제를 털어가며 사우와 부속건물을 정성스럽게 보수 또는 신축 관리하였다고 한다. 기와나 목조건물은 수시로 보수나 단청을 해야하니 조상을 받들기 위해들인 공이 얼마나 컸겠는가. 역시 장군의 후손들이다. 놀라운 사실은 장군의 후손들이 모두 무신들이었는데, 삼도수군통제사,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 등 정3품 당상관 이상의 벼슬을 지낸 사람이 무려 55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문신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하니. 이 모든 사실들이 장군의 공덕에 연유한 것이며 장군의 일생을 통한 교훈을 잊지 아니하고 실천한 결과라는 생각이다.

남해충렬사는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 이충무공묘비와 비각만 남기고 철폐되었다. 이후 1922년 향토인 윤기섭과 고준홍 양씨가 사비로 사우 3칸을 신축하여 장군의 신위를 모시게 되었는데 뜻있는 향인들의 도움으로 현재까지 보전되어 온 것이다. 왜 공의 시호를 따서 ‘충무사’라고 하지 않고 ‘충렬사’라고 했을까. 충렬사는 어떤 의미인가. 충렬사는 충신열사의 위패를 모시고 유덕을 기리는 사우를 의미하는데, 조선시대만 해도 전란을 겪으면서 순국한 충신열사들이 많았다. 해서 이들의 위패를 함께 모신 사당이 생겨나고 이 곳 충렬사처럼 이순신장군의 신위를 모신 사우가 생기도 했다. 그래서 이들 사우에 왕의 친필 사액이 내려지기도 했었는데, 대부분 ‘충렬사’라는 이름으로 하사되었다고 알고 있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충렬사’라는 이름을 가진 사우는 대략 8개정도이다. 가장 먼저 생긴 것이 부산의 충렬사로 1605년에 건립되었다. 이곳은 임진왜란의 충신 송상헌과 정발장군을 비롯하여 93위 위패를 모시고 있는데, 1624년 ‘충렬사’라는 사액을 받았다. 다음이 통영 충렬사로 이순신장군을 모신 충렬사다. 남해충렬사보다 27년이나 앞서 창사되었다. 남해충렬사는 통영 다음으로 세워졌는데, 임금으로부터 ‘충렬사’라는 사액은 같은 해에 받았다. 이 외에도 충렬사라는 이름을 가지고 이순신을 모신 사우로는 정읍 충렬사가 있다. 나머지 4 곳은 충주, 강화. 원주, 세종충렬사로 고려 말에서 임진왜란 이후까지의 그 지방 충신열사들의 위패를 모신 사우이다.

남해충렬사는 홍살문과 외삼문, 내삼문, 충렬사중건비, 이충무공묘비와 비각, 장군의 위패를 모신 본당, 충무공비, 충민공비, 가묘 그리고 삼문밖에 이충무공비와 청해루로 배치되어 있다. 외삼문은 충렬사의 경내를 출입하는 문이며 사우의 바깥 경계를 이루는 담장에 세웠다. 홍살문은 외삼문 앞에 세우는 것이 통례인데 남해충렬사는 외삼문위에 홍살을 붙여 세웠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내삼문이 나오는데, 내삼문을 중심으로 다시 담장을 둘러 사우를 보호토록 했다. 이순신의 신위를 모신 사우는 내삼문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삼문은 문이 세 개라는 것이며 외삼문이나 내삼문 그리고 홍살문 모두 기둥이나 문살에 붉은색의 칠을 하였다. 이는 음양오행 사상에 기초한 것으로 오행의 색깔과 방위에 따라 붉은색은 남쪽을 가리키며 잡귀를 쫓고 액을 막는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홍살문의 삼지창과 외삼문, 내삼문의 가운데 문에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이 문양은 신성한 의미와 복을 기원하는 뜻이라고 한다.

여기가 성역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모양이다. 그래서 세 개의 문 중 가운데 문은 신이 다니는 길이며 일반인은 출입 할 수 없고 동(오른쪽)입 서(왼쪽)출을 해야 한다. 내삼문을 오르는 계단도 3단으로 되어 있는데 가운데 계단이 조금 높다. 이는 신이 다니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시대 신분을 중시했던 사회의 문화현상이다. 이러한 문은 전국에 산재한 사당이나 사우, 공자를 모신 향교나 서원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보천욕일’ 비각이 바로 앞에 있는 데, 이 현판 역시 고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보천욕일’은 노량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연합작전을 지휘했던 명나라 장수 진린이 전쟁이 끝난 후 선조임금에게 올린 글 가운데 “이순신은 ‘경천위지의 재주’가 있고 ‘보천욕일’의 공이 있습니다.”라고 했는 데, 여기에서 연유한 것으로 ‘구멍 난 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켰다.’라는 뜻이다. 즉 나라의 운명을 바로잡은 큰 공덕을 의미한다. 비각은 지붕은 기와이며 비를 둘러싼 사방을 홍살로 세워 장식을 하였다. 비명은 ‘이충무공묘비’이다. 1660년에 세워진 이 비각의 비문에는 ‘有明朝鮮國三道水軍統制使 贈諡忠武李公廟碑 建立(충렬사에 크게 빛나는 조선국 삼도수군 통제사 시호는 충무인 이공의 사당 비석을 세움)’이라고 적혀 있는데, 의정부 우찬성 송시열이 짓고, 의정부 좌참찬 송준길이 썻다고 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은 이순신장군의 전공과 나라와 백성에게 끼친 덕을 칭송한 글이다. 비각을 지나면 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봉안한 사우인 본당이 있다. 현재의 사우는 1922년에 신축한 3간 사우이다. 사당내부의 정면에는 위패함이 봉안되어 있고, 그 위에는 영정이 모셔져 있다. 이 영정은 월전 장우성(張遇聖) 화백이 1953년에 그린 충무공의 초상화인데 영의정의 관복을 입고 앉아있는 모습이다. 정부에서 이 영정을 1973년에 표준영정으로 지정하였다. 원도(原圖)는 현충사에 봉안 되어 있으며 이것은 원도의 모사품(模寫品)이다. 사우 밖에서 안쪽을 들여다 보면 왼쪽벽에 명조팔사품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팔사품은 명의 수군도독 진린(陳璘) 장군이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명황제에 보고하자 명의 신종(神宗)이 그 전공을 치하하여 보내준 포상물이다. 여덟가지 품목 15점이다.

도독인 1개와 영패 1쌍, 귀도 1쌍, 참도 1쌍, 독전기 1쌍, 홍소령기 1쌍, 곡나팔 1쌍, 남소령기 1쌍이다. 도독의 인은 사실상 이순신 장군을 명나라 도독에 봉한 다는 징표이며, 이는 명나라 품계로 정1품 벼슬에 해당한다. 나머지 물품은 장군의 의장물이다. 각종의식이나 전쟁시에 행하는 의식을 수행 할 때 사용하는 데, 통제사가 높은 장막(帳幕)위로 오르면 측근인 비장(裨將) 두 사람이 우립(羽笠)을 쓰고 홍첩리(紅帖裏)를 입고 어깨에 영패를 메고 선다. 그리고 네 사람의 군관(軍官)이 귀도와 참도를 각각 어깨에 메고 독전기(督戰旗).홍소령기(紅小令旗)·남소령(藍小令旗)를 들고서 앞에 갈라선다. 이 팔사품은 이순신장군이 생존시에 받았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장군의 순국 후에 보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 이 물품은 통영충렬사에 보관되어 있다. 팔사물· 팔사품 또는 명조팔사품 등 여러 개의 명칭으로 불리어 왔는데 1966년 문화관광부에서 보물 제440호 「통영충렬사 팔사품」으로 명명(命名),지정하였다.

사우 뒤편에는 가묘가 있는 데, 담장으로 둘러쌓여 있고 사우에서 가묘로 가는 문을 내어 통행하게 했다. 이곳이 장군의 유해를 처음으로 안치했던 장소이다. 흔히 초빈 했다고 하는 데, 초빈은 집 바깥의 초야에 빈소를 마련했다는 뜻이다. 집안에 빈소를 차리는 것을 가빈이라 한다. 이곳에서 3일정도 머물렀다고 하는데, 이때의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단지 당시 전쟁 상황을 고려하여 몇 일간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이후에 고금도로 이운하여 그곳에서 10여 일간 머물렀다고 하며 육로를 따라 충남 아산으로 운구 되어 1599년 2월11일 금성산 자락에 장사했다. 참고로 조선시대의 장례기간을 살펴보면 임금은 5개월, 정3품 이상 사대부는 3개월, 이하 당하관은 1개월, 일반가정은 3일장, 5일장, 7일장 9일장 11일장 등으로 장례를 치렸다. 이순신 장군은 순국당시 당상관의 품계에 있었으므로 3개월 장을 치른 것이다. 외삼문 밖에는 이충무공비와 숙직사인 청해루가 있다. 남해충렬사에서는 매년 이충무공 탄신다례와 기향 제례를 봉행하고 있다.

작성자 : 경남문화관광해설사 정흔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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