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4 07:32 (일)
도연명(陶淵明)의 귀원전거(歸園田居)와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찬찬히 생각해 보니...(5)
도연명(陶淵明)의 귀원전거(歸園田居)와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찬찬히 생각해 보니...(5)
  • 감충효
  • 승인 2019.05.11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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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살기가 우선이라 성벽을 헐어서 제방을 쌓았다는 이야기

위의 경상도 지리지 곤남군조의 기록에서 죽산리 일대 언막이 공사에 읍성을 헐어서 사용했다는 내용에서 필자는 크나큰 충격을 받습니다. 바로 봉천 하류의 용왕바위 부근의 언을 쌓았던 크나큰 돌들이 성을 헐어서 사용되었다는 역사적 현장을 필자는 어릴 적부터 멱 감으며 가장 가까이서 그 큰 돌들을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몰랐습니다. 엄청난 봉천의 물에 언이 터지지 않으려면 저렇게 큰 돌들로 쌓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은 했습니다. 봉천 하류에서 강진바다로 나아가는 양쪽의 들을 파천들(破川-들)이라 불러 왔는데 말 그대로 홍수 때는 언이 터져 농토가 황페화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 봉천 하류에 언막이를 하여 파천들에 홍수가 밀려오는 것을 막았다는 역사적 사실에 그 때의 기록을 적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때만 해도 농사는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이라 하여 치수사업이 크나큰 비중을 차지하였고 우리 조상들은 그 때 그 현장에서 어떤 모습으로 홍수를 막았으며 마을과 농토를 지켰는가를 후대에 소상히 알려야 합니다. 그것이 곧 마을의 역사요, 남해의 역사이며 우리 조상들의 삶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봉내의 하류가 강진바다로 흘러드는 입구의 양쪽에 지금도 파천들은 있습니다. 망운산 줄기가 읍성을 가로 질러 강진 바다로 뿌려놓은 조그마한 산이 세 개가 있습니다. 맨 처음이 윗당산이고 둘째가 아랫당산 셋째가 동(東)뫼입니다. 홍수가 지면 봉천의 엄청난 수량은 죽산 마을 하마정 들을 가로질러 셋째인 동뫼를 정면으로 내리칩니다. 형뻘인 두 당산은 봉천의 훨씬 안쪽으로 있기에 물을 직접 맞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봉천에 노출된 동뫼이지만 그 많은 수량에도 끄떡 않습니다. 왜냐하면 산언저리가 단단한 바위로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봉천물이 내리치는 힘으로 침식된 그 곳은 깊이가 대단했지요. 그래서 그곳은 하동들의 다이빙 장소였습니다. 그 곳은 죽산리 아이들 뿐만 아니라 읍내의 거의 모든 아이들이 이 곳을 찾아 멱감으려 왔었지요. 쉽게 말해서 봉천은 죽산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읍내에서 강진바다로 나가는 길목이었으니 읍민들의 빨래터요 휴식공간이었습니다. 겨울은 당연히 썰매장이었지요.

홍수가 져 엄청난 수량의 물이 내리치면 동뫼로 연결되는 아래와 위의 방천이 위험해집니다. 위가 터지지 않으면 밑이 터지는 그런 경우였지요. 또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습니다. 바로 동뫼의 아래가 지금 말하려고 하는 성돌을 헐어 언을 쌓은 곳이라고 봅니다. 거기는 물이 모여서 급경사로 내리쳐 더욱 깊었지요. 그리고 가운데 큰 바위가 있어 용왕바위라고 불렀고 동네 사람들은 그 주변의 논을 ‘용왕마지기’라 불렀습니다. 지금은 봉천의 직강공사로 상전벽해가 되었습니다. 경상도 지리지 곤남군조의 기록에 나오는 성을 헐어서 쌓은 언의 그 성벽돌들은 모두 세멘트 콘크리트속으로 들어가버렸겠지요. 이 용왕바위는 봉천의 거센 물줄기가 동뫼의 끄트머리에서 방향을 틀어 다시 한 번 거세게 부딪치는 곳에 뿌리를 내려서 성벽돌로 쌓은 언이 허물어지지 않게 용왕마지기를 지키던 고마운 바위였습니다. 그 막강하고 유서깊은 용왕마지기 지킴이 용왕바위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되어 성벽돌과 함께 콘크리트화 되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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