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09:17 (금)
여명의 역사(2)
여명의 역사(2)
  • 감충효
  • 승인 2019.04.06 22: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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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 운동/근면․자조․협동이 가져온 한강의 기적

그 당시 새마을운동은 여건에 따라 도시새마을 운동과 농촌새마을 운동으로 분리되어 진행되었다. 새마을 운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전에 내가 살았던 마을에서는 여러 가지 마을의 발전을 위한 일들이 진행되고 있다가 새마을 운동이 본격화 되자 더욱 가속도가 붙었던 기억을 더듬어 본다. 소득증대를 하려면 논밭과 산에서 소득 작물을 재배하여야 하는데 그 때만 해도 대개의 마을은 사람만 다니는 좁은 길에 수확물을 제대로 운반할 기구가 없어 지게로 나르거나 머리에 이고 나르는 원시적인 농사를 지어야 했다. 좁은 골목 길 뿐이니 리어커나 경운기가 들어오는 것도 불가능했다. 농작물을 잘 가꾸어 다수확하려면 퇴비를 많이 넣어 땅심을 높여야하는데 다량의 퇴비를 생산해도 운반할 길이 협소하고 논밭에 넣을 비료 한 포대도 제대로 운반할 수 없을뿐더러 대량생산을 위한 비닐하우스 등의 농자재를 들여오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농촌 주거환경의 개선을 위해 초가집을 없애고 부엌개량을 하기 위한 목재나 석재, 모래를 운반하려 해도 어려움이 컸다.

이쯤 되면 마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한다. 새마을 운동 이념의 하나인 ‘자주적의사결정을 통해 주민들의, 주민에 의한, 주민을 위한 공동사업을 계획, 실행, 평가 및 환류의 과정으로 접근하는 일체의 지역사회개발’의 하위 개념이라 할 수 있는 이른 바 새마을 정신 중의 하나인 ‘자조(自助)’ 정신이다. 마을 원로를 위시해 새마을 지도자를 중심으로 이장과 개발위원, 부녀회, 청년회원들의 협의회가 이루어지고 그 중에 누군가가 자기 집이 잘려나가도 좋으니 길 내는데 내어놓겠다는 사람이 나오게 된다. 필자가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오니 필자의 집 큰 채가 길 쪽으로 길게 잘려 있었다. 4칸 집이었는데 큰 부엌, 큰방, 작은 방, 작은 부엌, 옆에 붙어 있던 화장실 까지 부분적으로 길이 되어버렸다.

그 당시 동네 유지셨던 아버지께서 맨 먼저 집을 내어 놓으셨다는 후문을 들었다. 어쨌든 그 집이 복구될 때까지 그 당시 할머님 이하 부모님, 동생들 셋, 필자까지 7식구는 행랑채 창고 같은 방에서 거의 한 달을 살았던 기억이 있다. 벽이 완성되고 나니 방이었던 천정이 길 쪽으로 노출되어 있는 것을 보고 허전한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우선 줄어든 방의 크기에 책상이나 장롱을 마루로 내어 놓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불평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집 뒤로 생긴 넓은 길로 리어카와 경운기는 물론 자동차까지 다닐 수 있었고 농산물을 힘들게 지게로 나르는 일과 아낙네들이 짐을 머리에 이고 위태위태하게 땀 뻘뻘 쏟으며 힘들게 통행하던 골목길의 답답함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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