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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역사(2)
비극의 역사(2)
  • 감충효
  • 승인 2019.03.10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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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과 역적/충신의 혼백과 역신의 염통

대한제국은 1876년 2월 26일 강화도조약 이후 제국주의의 침략 목표물로 전락하였고 한일 의정서, 제1차 한일 협약 등을 통하여 하나둘씩 가진 것을 빼앗기다가 1905년에는 을사보호조약으로 외교권 마저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고야 만다.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민영환(閔泳煥)은 1905년 11월 17일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자, 원임의정대신 조병세(趙秉世)를 소두(疏頭:상소의 대표)로 백관들과 연소(聯疏)를 올려 조약에 찬동한 을사 5적[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의 처형과 조약의 파기를 요구하였다. 두 차례의 상소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그는 마침내 세통의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통은 2천만 동포에게 각성을 요망하는 내용, 또 한통은 외국사절들에게 일본의 침략을 바로 보고 한국을 구해줄 것을 바라는 내용, 마지막 한통은 황제에게 올리는 내용이었다. 이 후로 유생과 전직 관리들은 상소투쟁을 벌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뜻있는 인사들이 죽음으로써 조국의 수호를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민영환 자결 이틀 후 함께 상소를 올린 특진관 조병세(趙秉世)가 극약을 먹고 자결하였고, 법부주사 송병찬(宋秉瓚), 전 참정(參政) 홍만식(洪萬植), 참찬(參贊) 이상설(李相卨), 주영공사 이한응(李漢應), 학부주사 이상철(李相哲), 윤두병(尹斗炳), 송병선(宋秉璿), 이건석(李建奭) 등의 중신과 지사들, 평양진위대 군인 전봉학(全奉學)은 물론 민영환의 인력거꾼도 뜻을 같이 하여 죽음으로 조국의 수호를 호소하였다. 이밖에 청국인 반종례(潘宗禮)와 일본인 니시자카(西坂坡豐)도 투신자결로 조약 반대의사를 천명하였다. 그런 한 편 적극적이고 과감한 투쟁에 떨쳐나선 이들도 있었다. 충청도에서는 전 참판 민종식(閔宗植)이, 전라도에서는 전 참찬 최익현(崔益鉉)이, 경상도에서는 신돌석(申乭石)이, 강원도에서는 유인석(柳麟錫)이 각각 의병을 일으켰고, 이근택, 권중현 등을 암살하려는 의거도 일어났다.

그와 함께 구국계몽운동도 활발하게 펼쳐졌다. 유교와 기독교 단체를 중심으로 기독교청년회·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자신회(自新會)·대한자강회·동아개진교육회(東亞開進敎育會)·서우학회(西友學會)·상업회의소(商業會議所) 등이 표면상으로는 문화운동을 표방하며 국민의 계몽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산하에 비밀결사를 두고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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